박재형 작
쉼없이 가만히 들리는 저소리,
어찌나 생생한지 빗속에 서있는 듯하다.
터 넓은 고택의 집마당,
여러대 걸쳐 내려온 종손의 고택이다.
지금 빗소리에 취한 종부가 대청에 앉아
망중한에 들었나 보다.
하얀 모시 저고리에 옅은 누런빛의 삼베치마를
차려입고서 말이다. 촉촉이 젖은 땅에서 풍기는
흙냄새, 게다가 비의 향기는 마음을 순하게
녹이면서 시간을 되돌린다.
문득 어릴적 우산도 없이 동네를 쏘다니던
추억의 빗속을 달려간다.
향의 빗소리를 들으려 고향집 대청마루에 앉았다.
고즈넉하고 푸근하다.
처마 끝에 똑똑 떨어지는 낙숫물소리는 향취에
젖는다. 어머니가 감자를 찌고 고추 장떡에
호박전을 부쳐 내놓으며 수건으로 흠뻑 젖은
내머리를 딱는다.
듣기 좋은 잔소리에 입과 눈은 즐거운 소리표정을
보이며 엄마의 뜨거운 감자를 호호 불며
먹던 일이 아른댄다.
비오는 날이면 영락없이 도지는
어머니의 손맛. 그런 기억을 더듬어 오늘처럼
비오는 날이면 양철집 지붕위에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소리를 기억한다. 나의 마음은 처마밑에
떨어지는 낙숫물을 받는 양동이, 지난 사랑이
담긴 물을 가득 받는 추억으로 잠긴다.
노란 우산을 펴들고 좁은 골목길을 나선다.
친구들과 비를 맞으며 겹겹으로 함께 걷던
동심의 세계에 젖어, 이내 어릴 적 추억은
기차를 타고 마음껏 철길을 달린다.
그럼 차창에 뿌려진 빗물은 공연한 욕심으로
얼룩졌던 나의 허물을 주룩주룩 씻어 내리고
나를 힘들고 슬프게 했던 부질없는 허영과 체면을
벗어 던지고 빈 가슴이 되어 빗속을 달린다.
추억이라는 손에 이끌려,
간간히 기차가 지나가는 강가의 조그만 역.
그 시절 아름다웠던 일들을 회상하며 철길옆에서
그날의 친구를 기억해본다.
그리고 빗소리에 그냥 나의 그리움을 담아
강물에 띄우고 나의 보고품을 기차에 태워 보낸다.
이렇게 비오는 날의 기억과 함께
여름은 무르익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