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형 작
속절 없는 게으름에 밤만 길어지는 겨울.
아우성치는 골바람도 숲속 빈 터에 누운 낙엽들도
이젠 곤한 잠에 떨어졌다.
이맘 때면 고요 속에 눈이 내린다.
새하얀 눈꽃 위로 새벽 달빛이 비치면
온통 은빛 차가운 바다다.
난 설레인다.
당신을 처음 만날 때 처럼...
세월에 흰꽃이 핀 듯 속절없는 그리움.
꿈결처럼 날아간 시간,
허무처럼 찾아오는 알 길 없는 외로움.
눈꽃에 묻혀 내리면 먼저 내달리는 그리움과
시간에 바래버린 은빛 사랑.
이제 눈 위에 남긴 발자국을 하얗게 묻어두었다.
난로 위에는 설설 끓는 보리차는 늘 구수하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장작이랑 솔 타는 냄새가 참 좋다.
바람은 차갑지만 당신과 나누던 이야기는 늘 따뜻했고,
정겨웠던 지나간 시간은 낡은 만년필처럼
술술 흘러나와 끊길 줄 모른다.
술이 좋아 술과 함께 놀고 벗이 좋아 벗과 함께 놀던
이야기들,
기억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서 좋다.
무릎까지 빠져오던 산길도 자근자근 들려오던
우리의 이야기에 이제는 잠이 오는지 조용하다.
그리고 찬바람에 여위어져가는 숲 속,
하얀 별이 쏟아져 내린다.
이렇게 겨울 숲 속은 점점 눈 속에 묻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