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성 교육의 간객관적 인식론과 인공지능 시대
심임섭(복잡성교육회 회장)
최근 알파고의 등장을 계기로 인공지능 시대 또는 4차 산업 혁명에 따른 사회 변화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한여름의 태양처럼 뜨겁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관심과 논의는 새로운 시대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 하는 우려 섞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할 뿐 아니라 현재 상황 역시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복잡성 교육을 연구하고 실천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인공지능의 문제는 인식론을 토대로 생각을 해야 그 가닥이 잡힌다고 생각한다. 인공지능과 관련한 논의 및 최근의 발달 추세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 중 하나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인지적 능력을 어느 정도까지 대체할 수 있는가 이며 이는 다름 아닌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만들어 가는가 하는 인식론의 문제를 토대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복잡성 교육의 인식론적 토대는 간객관성interobjectivity이다. 인식은 이미 범주가 결정된 객관적인 세상을 인식론적으로 특권적 지위에 있는 주체가 구성하거나 받아들이는 식으로 진행된다고 보아 지식이나 인식을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으로 설명하는 구성주의 인식론은 인식작용 및 행위에 있어 생물학적인 면이나 사물의 지위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반면 인식을 인식의 주체와 대상이 구조적으로 접속된 상태에서 서로 적응하면서 진화해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삶과 세상과 스스로를 창조해가는 과정으로 보는 간객관적 인식론은 인간과 사물을 인식론적으로 차별하지 않는다. 주체도 객관이고 대상도 객관으로 본다(마뚜라나는 이때의 객관을 객관주의 및 구성주의적 객관과 구별하기 위해 괄호 친 객관이라고 함).
즉 인식은 주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대상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인식과 행위는 주체 안의 무수한 주체성과 다른 무수한 주체를 포함한 무수한 대상들과의 접속과 소통의 안무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는 전반적인 디지털화로 사람과 사물의 관계가 더욱 복잡하게 얽히는 인공지능 시대에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 진다. 인식 및 행위의 주체로 인간을 설정하여 인간 또는 사회와 사물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게 되면 인간과 사물,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이제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말보다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통해 인식론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인간은 어차피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상상하기 마련이다. 이는 우리가 미래에 대해 생각할 때, 운명적인 한계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교훈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이른바 4차 산업 혁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이니만큼 1차 산업 혁명의 원인遠因 중 하나였던 사건 하나를 되새겨보면서 논의를 계속할까 한다.
보일의 공기 펌프와 객관주의의 등장
Shapin과 Schaffer(1989)는 17세기에 진행된 ‘공기 펌프’를 둘러싼 보일과 홉스의 논쟁에 대해 다루었다. 유럽의 17세기는 30년 전쟁으로 사회가 피폐해졌고 혼란이 가중되던 때로 어떻게 보면 이른바 4차 산업 혁명을 앞둔 지금 시기와 닮은 점이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재벌가에서 태어나고 최고 권위의 학회라고 할 수 있었던 런던 왕립 협회 회원이었으며 보일의 법칙으로 중학교 교과서에서도 익숙한 보일은 어지러운 세상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한 ‘인공물’을 만들게 되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공기 펌프’였다.
보일의 공기 펌프는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최첨단을 상징하는 새로운 발명품이었으며, 객관적인 사물의 지위로 인해 골치 아프게 난무하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불변의 원리, 이른바 과학적 원리를 제시한다고 생각되어 특히 당시의 귀족 중심의 왕립 협회 회원들, 지금으로 치면 독보적 위치에 있는 과학자들에 의해 그 권위를 인정받아 감히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단한 인공물이었다는 점에서 지금의 알파고와 매우 유사하다.
공기 펌프로 진공을 만들어 촛불을 넣으면 촛불은 여지없이 꺼지고, 쥐를 넣으면 쥐가 질식사하는 것을 과학자들에게 실험실에서 보여줌으로써 보일의 공기 펌프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상징물이 되었다. 새로운 질서의 철학은 자연과 인간, 사물과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자연과 사물에는 불변의 법칙과 진리가 작동하고 이러한 법칙과 진리는 이성을 가진 인간 주체에 의한 합리적 추론과 실험 즉 과학적 원리와 방법에 의해 알 수 있어, 이를 적용하면 세상은 평화롭게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 형이상학적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였다,
이에 대해 리바이어던의 저자 홉스가 실험의 불완전함(실제로 완벽한 진공이 만들어지지 않음), 추론의 불확실함(쥐가 꼭 진공으로 인해 죽는지 알 수 없음), 해석의 한계(과학적 원리 및 그를 기반으로 한 정치적 견해는 당시의 왕립 협회 회원에게만 특권적으로 주어짐) 등을 들어 반론을 제기하였지만 대세는 막을 수 없었고, 보일의 진공 펌프는 수백 년간 과학이 신앙처럼 지배하는 근대사회가 열리는데 기여하게 된다.
간주관적 인식론의 등장
근대사회를 지배한 세계관은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법칙과 질서에 의해 선형적 인과관계로 기계처럼 작동하는 세상이 있다는 것이고, 그러한 세상은 인간 주체에 의해 인식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거의 모든 학문과 교육, 그리고 인간의 사고와 행위는 이러한 틀에 맞추어 진행되었다. 이성을 가진 인간은 자연과 분리되었고, 사회에서 사물은 분리되었다.
이렇게 과학이 지배하는 세상이 진행되는 한편 20세기 후반에 이르게 되면, 여러 가지 사회문제와 환경 문제가 드러나면서 객관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구조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구성주의이다. 자연과학적인 것을 포함해서 지식은 객관적인 세상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구조를 갖고 있는 인간의 마음이나 사회로부터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이나 최근 막바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교육에서 각종 구성주의적 담론 및 실천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관점은 위의 ‘보일-홉스 논쟁’을 통해 Shapin과 Schaffer가 말하고자 한 바와 같은 것으로, 객관적이라고 권위가 부여된 원리나 질서도 실은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보일의 실험실에 접근해서 해석을 하고 권위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극히 한정된 특권적 집단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지식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즉 지식은 간주관적intersubjectivity이다. 인간의 마음 및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가는 이 세상은 간주관적으로 구성된 것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간주관적 인식론은 형이상학적 관점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한 것이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나 객관주의가 인간과 분리된 객관을 설정하고 인간의 이성에 인식론적으로 특권적 지위를 설정한 이분법적 구도의 형이상학이었다면, 사회적 구성주의는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여 인간의 마음을 사회적으로만 설명한다든지 인간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된 사회를 설정하여 사물을 사회에서 배제시킨 상태로 행위 능력을 인간에게만 부여한다는 면에서, 즉 관념적으로 설정된 사회에 존재론적으로 인식론적으로 특권적 지위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형이상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사회적인 측면과 생물학적 측면에서 살펴보자.
사회학적으로 바라본 간객관적 인식론
20세기 후반에 아프리카 콩고 분지에 있는 아마존 유역 다음으로 큰 열대 우림에서 여러 무리의 침팬지와 원숭이들이 발견된다. 수년간 사회생물학자들이 이들을 관찰한 결과에 의하면 순수 자연 상태의 이들도 훌륭하게 사회생활을 해낸다는 것이다.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먹고 싶은 욕구를 참는다든지, 암컷과 교미하기 위해 발정기가 아닌 평소에도 끊임없이 우정을 쌓아간다든지, 인간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지속적인 협상, 다른 원숭이에 대한 끊임없는 주의, 수고, 친목 행위, 붙임성, 권모술수와 긴장 등.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원숭이 공동체? 원숭이 사회? 상호작용? 문화? ... 인간이 관념적으로 만들어낸 그 어느 것이라기보다는, 사회 없이도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즉 사회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사회학의 창시자인 뒤르켐이 자연과 분리되고 인간 개인과도 분리된 나름의 법칙을 갖고 있는 사회를 설정한 것은 이로 인해 무너졌다고 보아야 한다. 즉 자연과 사회의 이분법이 비로소 제거된 것이다. 이는 인식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Bruno Latour(1996)는 ‘간객관성에 대하여On Interobjectivty'라는 짤막한 논문에서 원숭이들과 달리 인간은 상호작용하기 위해 다른 요소, 다른 시간, 다른 장소, 다른 행위자에 의지하며 이를 위해 상징symbol이 필요하지만 상징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사회에는 도처에 수많은 사물들objects이 있어 인간의 상호작용은 이러한 사물들에 의해 프레임화 되고 네트워크화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사회에 대해 생각할 때, 사물을 철저히 배제해왔음을 지적한다. 최근 다양한 사물인터넷의 등장으로 더욱 확실해 졌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은 철저하게 사물과의 연관 속에서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라는 주체를 설정하고 인간만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설정함으로써 사물을 배제해온 것이다.
그래서 Latour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과학에서 사물object을 객관적인objective 것으로 본 근대성의 산물이다. 세상, 지식, 주체성 등은 인간과 사물들의 동맹, 즉 간객관성interobjectivity에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행위와 관련된 개념들도 달라져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사회를 간주관성으로 설명하고 세상을 기계론적으로 바라볼 때는 주체인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어떤 이동이나 변형을 행위의 결과로 본다.
그러나 간객관적이고 관계론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는 행위의 결과는 관계의 변화가 되고 비로소 사물object도 사회적 행위자actor가 될 수 있게 된다. 인간인 행위자와 사물인 행위자, 즉 행위소가 네트워크화 되어 행위능력agency을 만들어 세상과 지식과 주체성은 창발된다. 이러한 창조력은 인간과 교통, 통신, 각종 장비, 장치, 사물인터넷 등 사물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인간의 삶이 역동적으로 전개되는 거대 도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도시지역에 거주하는 인구가 92%나 되는 우리나라의 경우 대한민국 전체가 하나의 거대 도시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보수당인 공화당의 담론인 공동체주의가 우리나라 진보교육감의 정책으로 채택되어 ‘배움의 공동체’, ‘전문적 공동체’, ‘마을 교육 공동체’ 등으로 집요하게 교사들에게 ‘공동체’가 강요되다시피 하는 것은 이러한 간객관성을 보지 못한 사회적 구성주의에 의한 왜곡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간객관성은 그 자체가 창조성으로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할 화두라고 본다면 사회적 구성주의를 중심으로 한 진보교육감의 정책은 진보에 걸맞은 것이 아니다.
뇌와 신체의 간객관성
인식론과 관련하여 사회적 구성주의가 갖는 한계는 인간의 행위나 마음이 사회적으로 구성되기도 하지만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 등 생물학적인 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노벨상 수상 경력이 있는 신경과학자인 Edelman(1992)의 가설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일종의 적응 과정인 진화를 통해 만들어졌다. 진화에는 사후적으로 적절히 선택되는 우연만이 작동한다. 유전정보 등으로 인한 선형적 인과관계에 따른 필연적 과정이나 결과는 없다.
발생학적으로, 뇌를 구성하는 신경망은 특정 종 고유의 구조가 형성되지만 미세한 해부학적 구조는 각 신경 세포의 운동과 각 세포가 어떤 세포와 이웃하느냐에 따라 만들어지는 여러 가지 돌기, 세포 소멸 등 확률적인 변동으로 인해 다양하게 변이한다. 시냅스 연결은 저마다의 물질적, 화학적 과정에 의해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뇌의 지도들은 재입력reentry을 통해 상호작용하면서 회귀적으로 종합recursive synthesis된다. 뉴런 집단 간의 상호 연결이 선택적으로 조정되면서 뇌는 발달한다. 뇌는 하나의 복잡계이다. 복잡계는 간객관성 그 자체이다.
인간의 뇌는 사물이나 사건들을 지각하여 범주화 한다. 그런데 이러한 범주화는 뇌 속에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고정된 구조나 틀에 의해 인간 외부의 대상을 객관적으로 범주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뇌 세포집단의 연결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인식 그 자체가 적응 현상이며 따라서 범주화는 반드시 지향성을 동반한다. 뿐만 아니라 범주화는 개체가 진화하고 살아오는 동안 생존에 유리한, 스피노자 식으로 얘기하면 코나투스를 보존하고 기쁜 정동이 일어나는 가치 기준과 연결되어 일어난다. 결코 외부에 객관적인 범주가 있어 그것을 그대로 인식한다거나 반드시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도 아니다.
기억은 먼저 진행된 범주화가 뇌 구조에 남긴 흔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하여 뇌의 구조가 적응하는 것이 학습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들이 체현되어embodied 진행된다는 것이다. 즉 몸과 함께 진행된다. 범주화, 기억, 학습에 덧붙여, 재범주화가 진화적으로 발생하게 되면 개체의 삶과 행위에 대한 분별력인 개념을 갖게 된다. 이 개념은 진화론적으로 언어 능력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개념은 언어와 달리 사회를 필요로 하지도 않고 어떤 표상의 구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개념 역시 외부 환경에서 오는 정보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뇌 자체의 구조 역동성을 통해 만들어진다.
사람의 뇌에는 식욕, 성욕 등 생존 가치와 관계되고 여러 신체 기관, 호르몬계 및 자율신경계와 연결되어 직접적으로 생존과 관계되는 뇌간brain stem과 대뇌 변연계limbic system가 있다. 한편 대뇌피질과 연결되어 감각기로부터 신호를 받아들이고, 운동기에 신호를 보내는 시상피질계thalamocortic system가 있는데 진화 과정에서 뇌간-변연계와 연결된다. 이는 인간이 생존과 관련하여 어떤 가치를 근거로 학습하고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뇌가 기호를 기억하고 사회적 소통이 이루지면서 진화적으로 언어 능력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면서 사회관계에서 자아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과, 세계를 모형화 할 수 있는 능력이 만들어진다. 이는 인간이 비로소 끊임없이 새로운 개념들을 만들고 고치는 능력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의미를 인식 할 수 있게 된 것은 가치-범주 기억, 개념 영역, 언어 영역 등이 연결되고 상호 작용함으로써 진화론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인공지능 논쟁과 인식론
이상 인간 뇌의 구조와 기능이 진화발생학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생물학적으로 대략 살펴보았는데 이를 통해 인간의 인식이나 마음, 행위를 사회적 구성주의로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회적 구성주의 인식론이 갖는 한계를 살펴보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인간 마음의 물리적 기반이 되는 뇌가 진화론적으로나 발생학적으로 몸과 연결되어 만들어졌다는 것은 인공 지능과 관련한 논의에서, 그리고 인식론과 관련하여 교육 이론과 실천에서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사실이다.
인지과학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인공지능 관련 논의와 인공지능 제작은 알고리즘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이러한 알고리즘은 인간 뇌의 구조 및 기능과 관계가 거의 없거나 매우 다른 것이다. 이미 지난 세기 후반부터 인공지능의 한계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어 왔다. 즉 인공 지능이 할 수 있는 것과 원리적으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논쟁인데, 현상학에 기반을 둔 드레퓌스나 사회적 구성주의 입장의 콜린스는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있다고 주장한다.
현상학에 기반하여 드레퓌스는 인공지능이 신체를 갖고 있지 않아 세계 내 존재로서 상황지워지지 않았으며 욕구가 있을 수 없어 사람과 같은 인공지능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다만 드레퓌스는 현상학적 시각이 적용되지 않는 독립된 영역이 있다고 보아 알고리즘을 사용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모의 될 수 있는 영역은 인공지능에 의해 수행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위에서 논한 인간 뇌의 진화론적으로 성립된 구조와 기능에서 알 수 있듯이 체현되어 표현되는 인지 및 마음의 기능은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즉 컴퓨터의 프로그램 규칙에 의해 처리되는 형식적인 연산 등도 실제 세계에서는 상황맥락적으로 이루어진다.
한편 사회적 구성주의 입장에서 콜린스는 인간이 알고리즘과 같은 방식으로 삶의 형식을 조직하는 한도 내에서 인공지능은 가능하다고 본다. 인간의 마음과 행위 및 지식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데, 사회적 소통을 할 수 없는 인공지능은 그러한 마음과 행위를 만들 수 없고 다만 인공지능의 알고리즘 형식대로 인간의 삶이 만들어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매우 궁색하고 간객관성을 무시한 형식화된 간주관성의 입장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현재 진행되는 코딩교육 및 소프트웨어 혹은 알고리즘 중심 교육은 이러한 콜린스의 입장과 겹쳐진다. 아이들은 알고리즘을 배우며 알고리즘대로 사고하고 그에 맞추어 세상을 이해하도록 교육받는다. 알고리즘을 만들기 위해 아이들은 토론하고 사회적으로 상호작용한다. 소프트웨어와 이른바 정보적 사고computational thinking가 대세가 되는 세상에서 경계해야할 점이다.
현상학적 입장이나 사회적 구성주의 입장과는 달리, 순차적이고 형식적으로 기호를 처리하는 방식처럼 인간의 마음이 작동한다고 보는 상징주의symbolism나 인간 뇌의 신경망을 모의하여 병렬적 분산처리 방식으로 인공지능을 만들려고 하는 연결주의connectionism 입장은 인간의 마음이나 이 세상이 상징주의나 연결주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부분이 있어 인공지능은 인간의 행위나 마음, 그리고 이 세상을 얼마든지 모의해낼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기초 없이 인공지능이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 감정이나 정서 등 비표상적인 심리 속성들을 프로그램으로 만들 수 없다는 점, 인간의 인식은 개체 발생적이면서 계통 발생적이라는 점, 이 세상은 구조접속으로 접속된 행위자들이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해 나가는 간객관적 복잡계라는 면에서 한계가 있는 관점이다. 즉 컴퓨터인 인공지능이 모의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분명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파고와 같이 최근의 비약적인 기술의 발전은 17세기 보일의 인공펌프가 근대사회를 열어젖힌 것과 같이 인공지능의 시대를 거침없이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보일의 인공펌프가 객관주의적 인식론의 시대를 위해 제시된 것이라면, 알파고는 간객관적 인식론의 시대에서 나온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인공 지능시대 간객관성의 의미
복잡성 교육의 원리가 간객관적 인식론인데, 간객관성을 주장하며 새롭게 주목받는 새로운 학문 중 하나가 ANT(actor network theory, 행위자연결망이론)이다. ANT는 지난 세기말에 진행된 이른바 과학전쟁에서 객관주의 및 사회적 구성주의와의 전면전에서 충분히 승리했다고 볼 수 있는 이론이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을 하였지만 ANT에 의하면 인간만을 행위자로 보는 것은 플라톤에서 시작하여 데카르트를 거쳐 이루어진 주체와 객체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에 근거한 인간중심의 편협한 사고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물도 행위자로 보아야 하는데 이는 인공지능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ANT에 의하면 행위 능력은 관계적 효과로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인간과 사물을 포함한 모든 행위자들의 연결이다. 행위자들은 연결망내에서의 관계를 통해 어떤 행위 능력을 발휘한다. 간단한 예 두 가지를 우선 들어보자. 계산기라는 사물이 있고 계산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때, 실제 계산 행위 및 그 결과는 사물이나 인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계산기의 성능과 처리 방식에 따라 입력에 따른 출력은 달라질 수 있으며, 같다 하더라도 그 해석 및 적용은 계산기와 연결된 즉 계산기를 사용하는 인간 및 맥락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콜린스). 요새 웬만한 문에 달린 문폐색기(이것도 알파고와 같이 테크놀로지가 적용된 엄연한 인공물 중 하나인데)에는 문을 여닫는 인간의 속성이 주어진 것이고 폐색기의 스프링 강도에 따른 문의 열리고 닫히는 속도는 그 문을 통과하는 인간 걸음걸이의 속도를 변화시킨다(Johnson).
인공지능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알파고가 맺는 관계가 문제인 것이다. 인공지능에는 인간 속성의 일부가 알고리즘이나 전문가 시스템 또는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딥런닝(심화학습) 방식으로 주어진 것이고 질적으로 보나 양적으로 보나 훨씬 더 풍부한 인간의 다른 속성들이 인공지능과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따라 창발되는 행위능력은 크게 달라진다. 인간의 다른 속성에는 인공지능이 모의할 수 없는, 진화발생학적으로 형성된 신체로부터 표현되는 정동affectus(스피노자, 에티카)의 그 모든 것이 해당된다.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 시대 필요한 역량(이 역량이라는 말은 문제가 많은 개념이기는 하다.
간객관적 인식론 입장에서는 자연 그 자체에서 생성된다는 의미의 역능puissance이라는 말이 더 적합)으로 공감 능력 등을 들고 있는 것도 그래서 일리가 있는 말이다. 인공지능 시대 인간의 학습이나 노동은 세상이나 삶과 분리된 학교나 공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에서 사람과 사물의 접속과 소통을 통해 간객관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비물질 노동 내지 정동 노동은 곧 삶과 세상의 창조를 의미한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인지노동을 대체하여 현재 선망의 대상인 회계사, 의사, 법조인 등도 사라진다고 한다. 그러나 사라진다고 보기보다는 인공지능과 새로운 형태의 회계사, 법조인, 의사 등이 연결되어 새로운 행위 능력을 만들게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옳다. 새로운 형태의 회계사, 법조인, 의사 등이 더 이상 회계사, 법조인, 의사 등으로 불리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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