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프레스센터에서 뉴데일리와 이인호 서울대명예교수와의 인터뷰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다음은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와의 일문일답이다
일각에서는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의 임명으로 독립운동가 유족들이 독립기념관장을 맡아온 관행이 깨졌다고 지적한다.
(이 교수) "독립기념관장은 독립운동가 후손이 맡아야 한다는 전제가 잘못됐다. 독립운동가는 신흥 귀족인가. 우리는 귀족 제도를 없애고 민주화를 이뤘다. 그런데 거꾸로 현대판 귀족 제도를 만들겠다는 것인가. 말이 안 된다."
이종찬 광복회장과 좌파 단체들이 김형석 관장을 '뉴라이트'라고 규정하는데.
(이 교수) "김 관장으로선 사퇴할 이유가 전혀 없다. 김 관장이 설사 뉴라이트라고 해도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 뉴라이트가 아니라고 변명할 필요조차 없다. 뉴라이트가 '종북 좌파', 소위 '빨갱이'라는 이들보다 못한, 추방돼야 할 이들인가. 소위 '블랙리스트' 논란으로 난리를 친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누군가를 뉴라이트라고 규정하고 사퇴를 요구하는 게 새로운 블랙리스트 아닌가. 다만 뉴라이트라는 말은 쓰지 않는 것이 낫다.
우리는 올바른 것과 역사의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굳이 '라이트', '레프트', '뉴레프트', '뉴라이트'라는 용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알아야 한다. 우리 역사에는 잘된 일도 있었고, 잘못된 일도 있었다. 비극도 있었고 좋은 일도 있었다. 그걸 다 있는 그대로 봐야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니까 당연히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역사를 봐야 한다. 우리가 북한을 중심으로 역사를 봐서는 안 될 것 아닌가."
이종찬 광복회장은 '일제강점기에 우리 국적이 일본이었다'고 말하는 이들을 뉴라이트라고 규정한다.
(이 교수) "이 회장과 나는 집안의 연고가 굉장히 깊다. 우리 외조부가 이 회장 조부의 형제분들과 아주 절친한 사이셨다. 그러나 나는 정말 그분이 전혀 이해가 안 된다.
이 회장에게 묻고 싶다. 이 회장은 나와 같은 해인 1936년에 태어나셨다. 당시 출생 신고를 하셨는가. 어느 나라 국민으로서 호적을 받게 되셨는가(이종찬 회장은 중국 국적 소유). 우리는 당시 일제의 호적을 받았다. 그때 우리가 한 나라의 '국민'(國民)이었다면, 우리에게 나라가 있었다면 왜 일제 하에서 우리가 식민지로 신음하고 독립운동을 했어야 했는가.
'우리가 1919년에 독립했다고 하지 않으면 독립운동을 폄훼하는 것이 된다'는 주장은 완전히 '어불성설'이다. 만약에 그때 나라가 수립됐다면 독립운동이 왜 필요했는가. 이 회장의 종조부가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인 이시영 선생이셨다. 그런데 이 회장은 그 분의 업적은 깡그리 무시하고 1930년대 초에 돌아가신 친조부(이회영) 얘기만 하면서 '1919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됐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정부가 대한민국의 건국과 해방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하는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따로 행사를 열겠다는 사람들은 '반역자들'이라고 규정해야 한다. 그 사람들을 무슨 설득을 하고 '이견'(異見)을 절충하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반역과 애국 사이에는 절충이 있어선 안 된다."
이 회장과 좌파들의 주장은 '일제 강점'은 불법이고 무효이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우리 국적이 일본이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교수) "사실 '일제강점기'도 종북 좌파 세력이 만들어낸 말이다. 북한이 대한민국의 시대를 '미제 강점기', 대한민국을 '미국의 괴뢰'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시대에는 '일제 식민지배, '일제', '일제 시대'라고 불렀지, 일제강점기라고 부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본이 군대를 동원해 우리를 점령함으로써 식민지로 삼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배를 사실로 인정하고 우리가 일제로부터 받았던 설움과 압박을 딛고 이렇게 훌륭한 국가로 성장했다고 나와야지, 일제 식민지배는 무효이며 우리는 독립국가였다고 주장하는 게 말이 되는가."
이 회장과 좌파 세력이 '뉴라이트'의 주장으로 규정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은 어떻게 보는가.
(이 교수)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자'라고 엮인 사람들이 '일본은 한국을 위해서 한국을 발전시켰다'고 주장했는가. 당시 식민지였던 한국이 일본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할 수 있어야 일본이 발전할 수 있으니 일본이 우리나라를 어느 정도 발전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했다고 해서 '친일'로 매도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일제 시대라고 식민지인 우리도 변화를 안 했겠는가. 발전을 당연히 어느 정도는 했다. 근대화에서 우리보다 앞서갔던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근대화 물결이 들어왔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질문 6) 좌파 세력이 친일몰이를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이 교수) "소위 '기득권'이라고 자신들이 규정하는 세력을 퇴치하고 나라를 뒤엎기 위해 친일을 내세우는 게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일제 치하에서 산다는 것을 아주 극단적으로 본다면 당시 나 같은 어린애도 친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학교에 가면 '황제폐하 만세'를 부르고 창씨개명을 해야 했는데 국민 전체가 친일파였다는 것인가. 유명한 사람일수록 일제에 협력하라는 압박을 강하게 받았는데 그런 사람들 모두를 천편일률적으로 친일파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북한은 친일파를 완전히 청산했기 때문에 민족의 독자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은 '난센스'다. 공산주의는 당시 '세계 공산당'으로 결속된 조직이었다. 마르크스가 1848년에 '공산당 선언'을 한 이후 한 국가에 공산당이 하나씩 생겼고 그 공산당들이 합쳐져 세계의 공산주의 구조를 만들었다. 당시 국가로서 권력을 가진 건 소련이 유일했으므로 소련의 공산당이 전 세계의 공산당 조직을 지휘했다. 당시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브다'나 정부 기관지 '이스베스챠'에는 예를 들어 '당신(김일성)의 나라가 독립한 것을 선포한다'는 등 공식 문건을 싣고 김일성에게는 중앙당 서기장 스탈린의 이름으로 비밀리에 지령을 내리는 이중구조가 있었다. 스탈린의 지령을 받는 북한이 민족의 독자성을 가졌다는 것인가."
결국 이들이 주장하는 건 '1919년 건국설'인 듯하다.
(이 교수) "'1919년 건국설'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일소(一掃)에 부치지 못하고 무슨 학설인 듯이 받아준 것이 처음부터 잘못이었다.
훗날 문재인 정권에서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한시준이라는 젊은 교수와의 일화를 고백하겠다. 한시준 교수가 당시 '1919년 임시정부의 수립이 곧 우리 대한민국의 수립이었다'고 얘기했다. 그 교수가 제 학생이었다면 '임시정부와 정부도 구분할 줄 모르느냐'고 야단을 쳤을 텐데, 젊은 교수의 기를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교수에게 건국 6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고 다른 얘기를 들어볼 기회를 줬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1919년 건국설'을 주장한 사람은 그 사람 하나가 아니었다. '저쪽'(종북 좌파 세력)의 지령에 따른, 대한민국을 허물기 위한 동시다발적인 작전이었다는 것을 당시에는 몰랐다.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것은 지식 부족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토대를 허물기 위해 고의로, 거짓말로 유치원생, 초등학생 등 어린이까지 세뇌하고 있다.
내 막내 조카손녀가 초등학교 1학년인데, 한두 달 초등학교에 다니더니 '이승만은 몹씨 나쁜 사람이다. 국민을 많이 죽였다'라는 얘기를 했다. 조카손녀의 엄마, 그리고 할머니인 제가 너무 놀라서 아니라고 했는데도 믿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토대를 허물기 위한 종북 좌파 세력의 작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질문 8) '1919년 건국설'은 왜 문제인가.
(이 교수) "'1919년 건국설'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다. 1948년 8월 15일이 아니라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 출범이 우리 대한민국의 수립이었다는 주장은 분명한 역사왜곡이다.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이 몇몇 사람의 발언으로 달라지는가. 임시정부는 어디까지나 임시정부이지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권능을 내외로 인정받는 정식 국가가 아니다. 국가가 수립된다는 건 국제적인 공인이 필요하며 국가가 국가로서의 권능을 가져야 가능하다.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를 우리의 망명 임시정부로 인정받게 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어느 나라도, 심지어는 임시정부에 우호적이었던 중국의 장개석 정부조차도 인정을 거부했다. 국내에서 일제의 압박을 받고 살던 한국 백성의 절대다수는 임시정부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우리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은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계승했다는 것이다. 법적으로 계승했다는 게 아니다. 대한민국은 5·10 선거를 통해서 만든 나라다. 제헌헌법 전문이 제일 잘 만들어졌었다. 그걸 바꾸지 말아야 했다. 나는 헌법 전문을 바꾼 게 잘못이라고 본다."
(질문 9) 애초에 건국절이 아닌 광복절을 제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교수)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돼야 독립될 수 있었다며 '해방 기념일'인 8월 15일에 맞춰서 1948년 독립을 선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8월 15일을 '독립기념일'로 제정하기 위해 당시 5·10 선거에서부터 국회를 만들고 헌법을 만들고 대통령을 선출하는 데 이르는 힘든 작업을 8월 15일까지 모두 마쳤던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출범 당시 국경일은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네 가지였다. 독립기념일이라고 하면 어감이 '절'(節)과 다르니까 독립기념일이라는 명칭을 '광복절'로 바꿨다.
그래서 1949년에는 '제1회 독립기념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한국전쟁 중 어느 언론(대구매일신문)이 '제2회 광복절 기념행사'를 '제5회 광복절 기념식'이라고 오보를 냈다. 일부러 그랬는지, 몰라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해방 후 건국 혼란이 생기기 시작했다."
(질문 10) 1948년 건국을 기념하기 위해 '건국절'을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떻게 보는가.
(이 교수) "광복이라는 말은 애국투쟁, 항일운동가들이 많이 썼고 우리 국민에게 익숙한 표현이다. 광복은 우리가 주권을 회복하고 자주독립을 이룬다는 의미다. 1945년 8월 15일까지 우리는 일본이 물러가면 우리가 독립국가가 되는 줄 알았다. 진정한 광복이 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1945년 8월 15일 광복은 해방으로 끝났기 때문에 우리의 독립을 위한 투쟁은 계속됐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건국절을 따로 제정할 필요는 없다. 광복절을 건국절로 굳이 바꿀 필요는 없다. 사실 건국과 광복은 모두 대한민국의 탄생을 의미한다. 익숙한 광복절이라는 말을 바꾸자고 하면 국민들의 저항이 있을 수 있다."
(질문 11) 윤석열 정부는 이러한 혼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이 교수) "올해 광복절부터 '대한민국 건국 76주년·해방 79주년 공동 기념 8·15 광복절'이라고 칭하면 된다. 윤석열 대통령의 광복절 식사(式辭)에 이 한 마디가 꼭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 역시 우물쭈물하며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표현을 자꾸 빼는 경향이 있다. 윤 대통령은 작년 광복절 식사에서 건국과 6·25 전쟁 부분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독립운동, 항일운동은 독립을 위한 투쟁이었다'고 말한 뒤 바로 한미동맹을 언급했다. 비겁했다. 대한민국이 탄생한 게 우리에게 독립이지, 다른 독립이 어디에 있는가."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 해방을 맞이했다. 1956년에 서울대 사학과를 중퇴하고 미국 웰슬리대로 유학했다. 한국 여성 최초로 하버드대에서 '러시아 역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컬럼비아대, 라트거스대 조교수, 고려대·서울대 교수를 지냈다. 1996년 핀란드 대사, 1998년 러시아 대사로 임명돼 건국 최초 여성 대사가 됐다. 이후 국제교류재단 이사장, 대통령자문 국민원로회의 위원,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KBS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