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형 작 11월은 계절이 오가는 길목이다. 그냥 가기엔 서운하기에 떠나기 전에 만나야 한다. 머물 수 없는 기다림, 잊지는 않는다고, 떠나기 전에 전해야 한다. 텅빈 벌판에 일렁이는 바람, 묻어오는 향기는 꿈인 듯... 그대 모습, 지난 시간을 바라보는 두눈엔 이별 담긴 눈물만 흘러내린다. 기웃거리다 떠나버린 가을, 허무처럼 찾아오는 알길없는 외로움, 눈꽃에 묻여 내리면 먼저 내달리는 그리움, 머뭇거리다 지워지는 기억처럼 그렇게 가버린다. 11월! 세월의 깊이 만큼 토닥토닥 다듬어진 듯 구순해 보이고 편안함을 간직한 여인처럼...... 여유로움이 묻어있어 아름다워 보이는 시간이다. 그동안 정신없이 달려온 시간들, 어느날 문득 발견한 나! 중년의 낯선 모습에 새삼 허무해져 가슴은 무너져 내리고 어느새 검은 머리는 윤기없이 거칠어지고 초점은 흐릿하게 겹쳐오면서 살아온 세월이 허무해 진다. 그동안 발목 잡혀온 현실이 억울하기도 하고, 나를 찾고자 하염없이 방황하던 세월...... 현실을 잊고 싶어 무작정 떠나고 싶다. 되돌릴 수 없는 젊은 날의 아쉬움인가? 사춘기 소녀처럼 여려진 가슴은 눈망울에 가득 고이는 그렁그렁한 눈물, 지난 삶에 연연하며 자신감을 잃어 체
박재형 작 10월의 마지막 열기는 담벼락 담장잎을 더욱 부드럽게 했다. 내일이면 매서운 바람에 한잎 한잎 떨어지고 찬서리에 떠는 붉은 장미, 제자리를 잃은 고아처럼 긴 이별을 생각한다. 오늘은 10월의 마지막날, 천천히 하루를 보내고 싶다. 말라 색바랜 고추밭, 논바닥의 볏가리를 덮은 자욱한 안개, 지워진 기억과 정지된 내 감정을 부르기 위해 아주 천천히 해돋이를 늦추고 싶다. 내일이면 하얀 들녘에 까마귀소리가 내려 앉는다. 산그림자가 마을 어귀로 다가 오고 해저녁 소죽간에 여물을 삶는 아낙이 길잃은 나그네를 반가이 맞겠지 오늘은 10월의 마지막날, 천천히 하루를 보내고 싶다. 검푸른 하늘, 새색시 입술처럼 걸린 초승달이 석양에 물들기 위해 아주 천천히 황금 파도로 해너미를 늦추고 싶다.
박재형 작 봄도 어느새 중간 쯤 들어섰다. 낮의 기온이 20도를 넘어서고 아침 저녁으로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킬 수 있을 만큼 따뜻해져 봄날의 포근함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바깥에는 꽃들이 만발해서 일부는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특히 벚꽃은 갑자기 폈다가 지기 때문에 오늘 저녁에 밤 벚꽃 구경을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신문에는 곳곳의 傷春의 장소와 꽃축제를 알리는 기사를 쏟아낸다. 이런 기사를 활용하여 주말을 즐겨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내일 오후부터 빗님이 오신다니 길거리에는 꽃잎이 뒤덮여 봄을 즐겨보려는 마음이 안타까움으로 변해 부풀은 가슴이 메어오지 않을까? 봄하면 역시 꽃소식이 으뜸이지만 그에 버금가는 봄비도 한껏 부풀은 우리를 차분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느끼게 한다. 봄비가 내리는 날 아파트 거실에서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의 장면과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곡 1번이나 영화 금지된 장난에 나오는 로망스(스페인 기타리스트 안토니오 루비다의 연주곡)나 우리나라 영화 이병헌 주연의 달콤한 인생에서 나오는 로망스(유키 구라모토의 첼로곡)를 들으면서 창밖의 빗줄기를 보며 산등성이 숲에 파랗게 묻어나는 연초록의 색깔과 아파트 화단에 핀 백목련 꽃잎에
박재형 작 기분이 우울해지나요? 마음이 아픈가요? 노년의 나이 65세가 되면 아무일도 아닌 그냥 스치는 바람처럼 지나가겠지. 하루에도 몇 번씩 기쁨과 슬픔의 다리를 건너고 흔들리며 춤추는 나이...... 지금껏 앞만 보고 달려왔다. 뒤를 돌아다볼 겨를 없이 그냥 살기 바빳고 그렇게 사는 것이 최선인 줄 알면서 달려 온 세월 이젠 멈춰보고 싶다 생각하지만. 멈추려고 애를 써 보면 애를 쓸수록 더 빨리 달리는 듯 싶은 시간은 이미 65세의 나이가 되어 버렸다...... 허무하고 마음은 마냥 씁쓸하고 내가 누군가 물어보니 아무 것도 아닌 것 같다 술 한잔에 마음을 달래보지만 정신은 더 또렷해지고 아마 내가 아는 친구만이 그런 세월이 같이 있었겠지! 어느날 우연히 지나던 길에 어릴 적 친구를 만나면 그 친구를 본 순간 시간을 뛰어 넘어 마음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지고 아무 생각 없이 가깝게 느껴지고 끌어들여지는 묘한 감정, 순수를 가장한 설레임으로 변해서 아마도 친구 눈에 비친 그 친구가 그냥 세월을 뛰어넘어 마냥 예쁘고 사랑스러울 수도 있겠지. 조금은 어리석고 바보같은 순수였을 지 모르지만 그런데 어쩌겠어? 어차피 우연히 마주친 그런 사람이 아니고 어쩌면 꼭 만나야
박재형 작 쉼없이 가만히 들리는 저소리, 어찌나 생생한지 빗속에 서있는 듯하다. 터 넓은 고택의 집마당, 여러대 걸쳐 내려온 종손의 고택이다. 지금 빗소리에 취한 종부가 대청에 앉아 망중한에 들었나 보다. 하얀 모시 저고리에 옅은 누런빛의 삼베치마를 차려입고서 말이다. 촉촉이 젖은 땅에서 풍기는 흙냄새, 게다가 비의 향기는 마음을 순하게 녹이면서 시간을 되돌린다. 문득 어릴적 우산도 없이 동네를 쏘다니던 추억의 빗속을 달려간다. 향의 빗소리를 들으려 고향집 대청마루에 앉았다. 고즈넉하고 푸근하다. 처마 끝에 똑똑 떨어지는 낙숫물소리는 향취에 젖는다. 어머니가 감자를 찌고 고추 장떡에 호박전을 부쳐 내놓으며 수건으로 흠뻑 젖은 내머리를 딱는다. 듣기 좋은 잔소리에 입과 눈은 즐거운 소리표정을 보이며 엄마의 뜨거운 감자를 호호 불며 먹던 일이 아른댄다. 비오는 날이면 영락없이 도지는 어머니의 손맛. 그런 기억을 더듬어 오늘처럼 비오는 날이면 양철집 지붕위에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소리를 기억한다. 나의 마음은 처마밑에 떨어지는 낙숫물을 받는 양동이, 지난 사랑이 담긴 물을 가득 받는 추억으로 잠긴다. 노란 우산을 펴들고 좁은 골목길을 나선다. 친구들과 비를 맞으며
박재형 작 아직 초여름인데, 5월부터 비는 장마철처럼 짧게 자주 내린다. 비가 너무 자주 와서 녹음이 짙어진 집 뒷산을 갈 수 없어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음악과 함께 즐긴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강석우의 “아름다운 당신에게”란 라디오 다이얼에서 그의 굵고 신뢰감있는 목소리, 클래식 선율은 나의 감성을 두드린다. 혼자만의 시간은 고요함과 편안함의 소리로 나만을 위하는 시간이다. 지금 밖에 비가 내린다. 사람들은 저마다 우산을 쓰고 회색 빛 거리를 쏘다니지만 모두가 목표를 향해 걸어간다. 나는 가만히 저 빗속에 서서 빗소리 듣고 나의 시간과 공간을 확인하고 싶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하늘을 쳐다보면 오던 길도 알 수 없고 가는 길도 알 수 없는 시공간에서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언제나 멈추지 않는 시간, 뒤돌아 볼 겨를도 없이 그리 바쁘게 어디를 향해 달려 가는지? 이미 동네 어귀 개나리는 노란빛으로 활짝 피어 반기는데, 진달래 꽃 꺾어서 오려나, 풀향기 묻혀서 오려나 봄비가 이렇듯 초록빛 그리움을 듬뿍 안고 오는데 아른 아른 내 눈을 어지럽히는 그대의 모습은 끝내 보이질 않구려! 들리나요? 주룩주룩 내리는 빗소리, 종일 저렇게 나의
박재형 작 세월이 많이 지났다. 어린시절 고향이 생각난다. 동네친구들과 놀고 지내던 골목, 다방구하면서 동네 형들과 옆동네를 지나 멀리 바닷가로 가서 처음 맡아보는 꼬리한 생선 썩는 냄새, 갈매기 소리, 바닷물에 떠있는 배들과 술집아가씨들의 울긋불긋한 화장에 담배를 피워물고 뱃사람인 듯 삼촌뻘되는 아저씨와 오가는 이상한 대화, 생선좌판을 펴놓고 가격 흥정을 하는 아지매, 망개떡 장수의 “망개~~~떡!” 소리, 좌판에서 팥죽먹는 거지들, 대낮에 파나마 모자를 쓰고 하얀두루마기를 입은 노인네가 돼지국밥집에 앉아 코가 빨개지도록 막걸리를 마시고 혼자 푸념하는 소리, 이런 저런 소리들이 합쳐 거리는 더욱 복잡하고 어수선했지만 한편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지금도 고향을 가면 그 거리를 찾는다. 옛날 같은 무채색 색깔의 신기하고 놀랍고 반가운 색깔은 없다. 오히려 다양하고 화려하고 짙어진 거리의 색깔이 단조로움을 느낀다. 그 시절에는 동네에 약간 정신이 나간 누나들이 가끔 보였다. 다른 동네에 사는 아는 누나인데, 사연은 잘 모르지만 우리 동네에 와서 헝크러진 머리와 때묻은 치마 저고리,그리고 담벼락 넘어 나와있는 꽃을 꺽으며 머리에도 꽂고 저고리에도 꽂고하며 혼자 뭐라
박재형 작 回想Ⅰ 시간이 잊혀진 그리움, 잊은 줄 알았다. 낯선 시간들에 잊어버린 기억과 순간 순간 자잘했던 생각은 시간의 깊이만큼 채워지지 않는다. 시간을 빠져나온 그리움, 지워지지 않았다. 희뿌연 안개비, 멀리 가까이인 듯, 그림자처럼 흐릿한 저 모습 알 수 없이 흐르는 정은 가슴에 내리는 행복을 꿈꾸며 그 안에 잠기고 싶다. 시간이 데려간 그리움, 또 다른 별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인연은 스쳐가도,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이 될지라도 아름다운 그리움이 행복한 얼굴로 떠오르면 좋겠다. 回想 Ⅱ 노년의 삶은 가을날 바람에 스쳐 떨어지는 낙엽같은 것. 만추에 차가운 달빛을 받으며 대문 앞에 다다라 문을 밀치지 못하고 서성이는 마음 어쩌면 안온하고 평화로움이 있어 아름다워라. 몹시도 보고픈 사람이 있어 기다리다 만날 수 있다면 어쩌면 행복한 기쁨에 축복이어라 이제 해가 저물고 인생도 저물고 어느 하나 소중하고 그립지 않은 것이 없지만 아쉽다고 생각하니 귀하게 보이는 걸까? 젊음이 소중한 것을 조금만 일찍 알았던들 하는 아쉬움보다 지금이 가장 젊은 시기이기에 무엇이든 시작하는 마음이 일어나는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