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형 작 쉼없이 가만히 들리는 저소리, 어찌나 생생한지 빗속에 서있는 듯하다. 터 넓은 고택의 집마당, 여러대 걸쳐 내려온 종손의 고택, 지금 빗소리에 취한 종부가 대청에 앉아 망중한에 들었나 보다. 하얀 모시 저고리에 옅은 누란빛의 치마를 차려입고서 말이다. 촉촉이 젖은 땅에서 풍기는 흙냄새, 게다가 비의 향기는 마음을 순하게 녹이면서 시간을 되돌린다. 문득 어릴적 우산도 없이 동네를 쏴다니던 추억의 빗속을 달려간다. 고향의 빗소리를 들으려 고향집 대청마루에 앉았다. 고즈넉하고 푸근하다. 처마 끝에 똑똑 떨어지는 낙숫물소리는 향취에 젖는다. 어머니가 감자를 찌고 고추 장떡에 호박전을 부쳐 내놓으며 수건으로 흠뻑 젖은 내 머리를 닦는다. 듣기 좋은 잔소리에 입과 눈은 즐거운 소리표정을 보이며 엄마의 뜨거운 감자를 호호 불며 먹던 일이 아른댄다. 비오는 날이면 영락없이 도지는 어머니의 손맛. 그런 기억을 더듬어 오늘처럼 비오는 날이면 양철집 지붕위에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소리를 기억한다. 나의 마음은 처마밑에 떨어지는 낙숫물을 받는 양동이, 지난 사랑이 담긴 물을 가득 받는 추억으로 잠긴다. 예쁜 우산을 펴들고 좁은 골목길을 나선다. 친구들과 비를 맞으며 겹겹
박재형 작 어젯밤에 우리집 2층 베란다로 귀뚜라미가 들어왔다. 쓰르르 쓰르르 소리에 잠이 깨어 거실로 나가보니 窓(창)이 열려있고 서늘한 寒氣(한기)가 몸을 감싼다. 순간 가을이 문득 찾아온 것 같고, 시간이 갑자기 흘러간 것 처럼 세월의 無常(무상)함과 허전함이 한꺼번에 찾아와 쓸쓸함이 밀려든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엔, 지난 가을 몹시도 계절의 가슴앓이를 하여, 정작 가을의 秋色(추색)인 파란 하늘과 황금색 들녘, 산들바람의 아름다운 풍경을 잊어버린 체 가슴에는 孤獨(고독)만 채우고, 세월을 잃어버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가을의 고독은 여름이 뜨겁고 길수록, 매미 울음소리가 거세고 오랠 수록, 가을은 문득 다가온다.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精熱의 기운은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온몸을 얼게한다. 가을 태양의 시린 햇살은 마음을 어디에 둬야할지, 초점이 흐리면서 고독으로 다가와 세상으로 부터 떨어진 外部人(외부인)으로 轉落(전락)하게 한다 . 한여름날 저녁 붉은 노을 빛에 서풍을 타고 불어오는 갈바람과 함께 따뜻하고 쓸쓸한 햇살이 내 얼굴을 비춘다, 산들바람이 가끔은 내 눈을 시원하게 씻어주는 순간이 오면, 가을은 나의 가슴을 열어 파란하늘로 물들이게 하고, 점점
박재형 작 검푸른 숲, 여름 가득 비릿한 향 어둔 그림자는 햇살을 쫒는다.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높은 가지를 향해 하늘을 오른다. 지난 날 나목으로 자리를 지키며 내 안으로 치닫던 고독의 시간이 갔지만, 거침없는 푸른 빛을 발하는 숲길은 또 다른 적막감에 잠긴다. 깊은 골짜기, 뻐꾹기 울음에 불안하고 무더위에 지쳐 삼키는 매미소리와 제자리를 도는 잠자리가 정오를 지킨다. 귓전에 들리는 물소리에 발목잡힌 생각, 바위를 가르는 물색에 더 없이 좋은 여름 숲의 기억이 꿈꾸 듯 깨어 숲속 푸른 빛의 열정을 다시 바라본다.
박재형 작 기도와 상념 가득한 절집에 초록 연잎과 연분홍 꽃이 피고 진다. 잎새에 허물을 벗는 잠자리, 날개를 떨은 영상은 안개처럼 흩어졌다. 씨줄과 날줄이 맞물리는 틈새에서 피조(被造)된 자아는 시공을 돌아 진실에 닿지 못하고 의문과 궁금증만 안은 채 모여졌다 헤어지는 명의 현상을 쫓는 허전한 시간의 연속이다. 세상은 늘 변하고 순환하고 흘러가는 세월속에 모두가 그러하거늘 품고 갈 인연도, 아쉬움을 남긴 인연도 햇살이 거두어 간 뜨락에 스쳐가는 바람일 뿐... 부처님의 법보(法寶)를 구음(謳吟)하는 구도자의 엄청난 위력의 말씀과 처마 끝 풍경소리는 절간의 여운으로 탑을 향한다 주)구음(謳吟) : 여러 사람의 입을 모아 칭송하여 노래함.
박재형 작 5월의 푸른 하늘을 봅니다. 구름이 산 허리에 걸려있고 초록이 시원합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들이 숲에 가득합니다. 가슴을 펴고 닫혀있던 마음을 열어 마음껏 심호흡을 하니 청량함이 날아갈 듯 가볍습니다. 이팝나무 꽃 고운 분 바르고 연두빛 사과꽃잎 섀도우를 펴 바르니 내가 5월입니다. 그리고 꽃잎 입술에 붉은색을 칠하니 나는 복사꽃으로 핍니다. 이제 흘러버린 시간, 연연함도 아쉬움도 말자. 귓가에 속삭임처럼 아른거리는 그리움이 남아 있는 한 난 여전히 푸른 5월입니다.
눈이 부시게 좋은 봄날 주위를 둘러보면 연둣빛은 물론 분홍빛 노란빛 하얀빛 예쁜 꽃들이 반긴다. 바쁘게 살아가는 세상 문득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고, 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해가 바뀌어도, 살았는지, 죽었는지, 서로 나 몰라라 잊혀져가는 세상 문득 보고싶고 안부를 묻고싶은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그런 사람이 있다는게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인가?
박재형 작 하얀 목련꽃이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 차가운 듯 움추린 모습이 함초롬히 아름답습니다. 어느날 내게 봄은 사랑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따뜻한 마음과 예쁘고 정겨운 꽃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담장 옆 순박한 개나리 애잔한 그리움을 안겨주는 노란 꽃잎 산수유 차가운 눈속에서 떨어야 했고 그리움으로 아파하는 시간이 당신을 만나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이제 숙명처럼 아름다움으로 잉태된 난 설움을 잊어버린 체사랑이란 이름으로 당신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박재형 작 한꺼번에 몰려나온 꽃망울이 함박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이미 터진 꽃망울은 하늘을 덮었고 손바닥을 편 내 손위에 한송이 꽃으로 다시 핍니다. 바라보기에도 아름다운 모습, 연신 하얗게 웃는 당신은 너무도 천진스러워 내 마음은 새털처럼 가볍습니다. 파란 하늘과 구름까지 가린 흰 꽃잎은 겨우내 받은 설움도 잊은 채 봄 바람에 춤을 춥니다. 일렁이는 불빛을 받으며 하염없이 춤을 춥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