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형 작 겨울 창밖, 빗소리에 인기척인 듯 창문을 여니 설렁한 바람하나 없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방울, 춥지 않는 날씨에 색상이 뚜렷한 갈색들의 절묘한 조화와 촉촉이 젖은 대지의 사물은 눈 앞에 펼쳐져 풍경을 더 진하게한다. 계절이 바뀌는 송년의 길목, 차분해지는 마음에 내린 비는 오늘을 정리하고 내일을 다시 여는 그리움처럼 방울방울 맺힌다. 시간이 갈수록 도시의 회색빛 네온사인에 비는 굵어졌다. 아스팔트 도로 위 포장마차의 연약한 빛을 따라 채워지는 가난한 자들의 꿈, 작은 아픔은 씁쓸한 미소를 담고 겨울비는 빛을 따라 내린다. 비 내리는 길 위에 회색빛 미소가 스며드는 이 슬픔은 무엇인가? 이루지 못한 꿈인가? 애타는 마음에 멈춰진 시간처럼, 빈가슴은 사무친 그리움과 쓸쓸함이 다가온다. 한겨울에 눈은 왜 비로 변했을까? 그리움이 변해 미움이 되어 내게 멀리 떠나간 사람처럼 사랑의 행복한 순간들은 이제 다시 오지 않는가? 겨울비 내리는 가로등 빛 불빛 속을 서둘러서 달리면 사랑이 찾아질까? 못미더운 생각으로 가득차, 나는 어디있나 싶다. 그러나 지금은 내 곁에 오늘이 있다. 지난 날을 견뎌낼 수 있는 마음의 빈자리가 있어 배회를 견뎌낼 수 있었는지 모른다
박재형 작 속절 없는 게으름에 밤만 길어지는 겨울. 아우성치는 골바람도 숲속 빈 터에 누운 낙엽들도 이젠 곤한 잠에 떨어졌다. 이맘 때면 고요 속에 눈이 내린다. 새하얀 눈꽃 위로 새벽 달빛이 비치면 온통 은빛 차가운 바다다. 난 설레인다. 당신을 처음 만날 때 처럼... 세월에 흰꽃이 핀 듯 속절없는 그리움. 꿈결처럼 날아간 시간, 허무처럼 찾아오는 알 길 없는 외로움. 눈꽃에 묻혀 내리면 먼저 내달리는 그리움과 시간에 바래버린 은빛 사랑. 이제 눈 위에 남긴 발자국을 하얗게 묻어두었다. 난로 위에는 설설 끓는 보리차는 늘 구수하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장작이랑 솔 타는 냄새가 참 좋다. 바람은 차갑지만 당신과 나누던 이야기는 늘 따뜻했고, 정겨웠던 지나간 시간은 낡은 만년필처럼 술술 흘러나와 끊길 줄 모른다. 술이 좋아 술과 함께 놀고 벗이 좋아 벗과 함께 놀던 이야기들, 기억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서 좋다. 무릎까지 빠져오던 산길도 자근자근 들려오던 우리의 이야기에 이제는 잠이 오는지 조용하다. 그리고 찬바람에 여위어져가는 숲 속, 하얀 별이 쏟아져 내린다. 이렇게 겨울 숲 속은 점점 눈 속에 묻혀간다.
박재형 작 늘 생각한다. 비오는 날 빗방울 속에서 바람부는 날 바람 속에서 언제나 청춘처럼 내게 왔고 너를 향했다. 햇살이 있던 없던 늘 푸른빛이었고 하얀빛이었다. 푸르르고 하얀 순수함이 두근거리고 따듯해짐을 느낄 수 있어 좋아 너를 향한다. 늘 생각한다. 모든 의미 있는 것 이슬 맺힌 풀잎, 반짝이는 별빛에도 내 가슴을 꼭꼭 채우고 싶고 가슴이 따뜻한 너에게 고운 정 하나 새기고 싶다. 아무런 말 없어도 가까이 보이는 알 수 없이 흐르는 정은 세월이 변하고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에도 행복한 얼굴로 떠오르고 싶다.
박재형 작 첫눈이 내리면 왠지 나도 모르게 메여오는 가슴으로 눈발의 자욱을 쫏는다. 창가에서 나부끼는 광경을 그저 말없이 바라보는 심정, 스스로를 자책하게 하고 있는지도 내 마음을 비집고 내미는 하얀 눈꽃송이,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짧은 순간 긴 여운으로 남아 새삼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 같다.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발자국의 기억은 멋진 낭만의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잠시 나는 다른 세상을 상상하며 편안해 지고싶다. 그리고 첫눈이 내리면 몹시도 보고파 길목에서 기다리며 언 채로 서있는 눈사람처럼 하얀 그리움이고 싶다.
박재형 작 가을은 상실의 계절이 아니라 채운 것을 조용히 비워버리는 계절이다 마음 속에 가득찬 욕심과 삶의 허허로움을 떨쳐버리고 어느 날 훌훌 벗어버리고 떠난다. 지난 세월은 용서도 이해도 사랑도 늘 부족했던 시간 언제나 자신에게 너그러웠고 늘 어디인지 알 수가 없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시간의 끝자락에 서있으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무런 대답 없이 이별을 맞을까? 모든 것을 이해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이면서 세월을 탓하지는 않으리라 뒤돌아보면 미련도 후회도 없지만 더러는 사치스런 투정은 있겠지. 삶의 그림자가 그려진 기억일랑 잘 익은 향기로 지워버리고 빛깔 고운 옷을 입혀 사랑을 노래하자.
박재형 작 가을이 저만치 가고 있다. 머물러 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다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돌아보지 않고 홀연히 가버린다. 가지끝에 매달린 잎새 긴 햇살을 받으며 조용히 깊은 곳에 닿았다. 낙엽진 계곡의 물소리는 깊어가고 바람은 차가운데 외로운 마음 홀로 서 지난 시간이 무의미하지 않기에 더 낮은 곳을 향하리란 내 생각의 씨를 뿌린다. 계절이 오가는 길목 머물 수 없는 기다림 잊지는 않았다고 떠나기 전에 전해야 하는데 세월에 바래버린 은빛사랑 낙엽에 묻어두고 가을은 그렇게 가버린다.
박재형 작 흰눈이 내리는 12월, 그믐을 달리는 열차는 시골 간이역에 멈추려고 하얀 증기를 내품으며 역사로 들어선다. 고향을 찾는 사람들 하나, 둘 플랫홈을 나와 제 갈길을 찾아 촘촘히 발걸음을 챙기며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외로움을 남기고 가는 발자국, 억울함을 남기고 가는 발자국, 슬픔을 남기고 가는 발자국, 욕망을 남기고 가는 발자국, 하얀 눈이 닾혔다. 그 위에 당신의 아픈 추억이 채곡 채곡 쌓이는 눈그림자의 침묵이 가라안고 가로등 불빛에 비친 함박눈은 소원을 이룰 듯 떨리는 가슴으로 달려온다. 까만 밤, 나는 외톨이지만 혼자가 아니다. 하얀 눈길을 걸으며 말문이 터져 샘솟는 그리움과 벅찬 가슴으로 첫사랑의 맹서를 소리 질러보는 나는 네가 보고 싶다. 가슴속 어둠에서 빛으로 다가오고 날마다 나를 깨우며, 검은 눈동자는 사랑한다는 눈빛으로 웃고있는 세상에 너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람, 네가 보고 싶다. 눈이 내린다. 온 세상 하얗게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촛불을 켜든 나는 무거운 육신을 벗고 슬픈 영혼을 달래려 허공 속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멀리서 컹컹 개짖는 소리에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을 생각하고 기다
박재형 작 얼마나 보고팠던가! 얼마나 그리웠던가! 이 추운 겨울 아득한 만남이 이루어 지는 첫눈. 어린아이의 순진한 눈길 속에도, 어른의 깊은 슬픔의 눈동자 속에도 사뿐이 내려안는 희망이다. 온통 하얗게 물들이는 첫눈의 감회는 마음껏 한없이 노래할 수는 없지만 겨울 오래도록 이어간다. 첫눈 내리는 날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어 길로 나가 포근히 안겨드는 그들을 받아 가슴 속 깊이 스며들도록 여기 저기, 이산 저산에 말하여 줍니다. 그리고 첫눈의 사랑은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다. 瑞雪(서설)로 내리는 축복의 눈, 하얀 웃음꽃이 내리는 첫눈은 사랑이다. 그대를 향해 열려있는 마음의 길을 따라 저멀리 세상 끝까지 아주 천천히 걸어본다. 가다보면 그대 마음이 불빛으로 새어나오는 아담한 창문의 카페에서 두근거리는 손길로 또 한 세상의 문을 열고,미소도 고운 불빛 속으로 들어가 본다. 장작 난로가 귓불 간지럽게 더운 숨결을 훈훈하게 껴안는 동안 지나온 삶은 하얀 세상의 경이로운 정경만 보게 되리라. 내리는 눈은 또 지난 세월을 잘 가라며, 엇갈린 세상을 접고 또 접어 동면하는 삼라만상 돌아보면 모두 피폐하고 쓸쓸하고 허전하다. 하얀 눈송이는 가난한 마음 위로 맑은 꽃으로